채용 공고의 자격 요건은 대체로 전문성으로 채워집니다. 데이터 분석 경력 5년, 퍼포먼스 마케팅 경험, 특정 도구 사용 능력. 오랫동안 유효했던 기준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이 기준으로 뽑은 인재가 기대만큼의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늘고 있습니다.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개별 전문성 하나만으로 풀리는 문제가 회사 안에서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별 전문성의 값이 내려가는 이유
인공지능은 법무 검토, 회계 처리, 카피라이팅, 번역, 기초 분석, 코드 작성처럼 명확히 정의된 작업에서 빠르게 실용적인 수준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 영역에서 사람이 가지던 시간과 비용의 우위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물론 전문성이 필요 없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결과물을 판단하고 책임지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며, 그 판단에는 깊은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다만 전문성만 가지고 있고 그것을 다른 맥락과 연결하지 못하면, 대체되기 쉬운 위치에 놓이기 쉬워졌다는 것이 달라진 점입니다.
동시에 비즈니스의 난이도는 올라갔습니다. 하나의 문제에 가격, 채널, 브랜드, 데이터, 규제, 조직 문제가 한꺼번에 얽혀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런 문제는 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 한 명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경계인(Marginal Man)이라는 개념
사회학자 로버트 파크는 1928년 논문에서 두 개의 문화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을 경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쪽을 모두 낯설게 볼 수 있는 위치입니다. 파크는 이 위치가 불편하지만 동시에 남다른 관찰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개념을 기업 조직에 옮기면, 경계인은 부서와 전문 분야와 사고방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맥락을 종합해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인문학과 공학, 내부 데이터와 외부 데이터, 고객의 말과 숫자의 패턴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라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자기 전문 영역이 분명하되, 그 영역 바깥의 언어를 알아듣고 번역할 수 있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AI 시대에 회사가 사야 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 답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답은 빠르게 낡지만 답을 만드는 방식은 남습니다.
조직 안에서 경계인을 알아보는 신호
경계인은 이력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편입니다. 오히려 전형적인 경로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걸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장에서 자주 관찰되는 신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서를 옮겨 다닌 이력이 있습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 사람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여러 부서의 언어를 익힌 사람일 수 있습니다. 회의에서 다른 부서 사정을 대신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질문의 층위가 다릅니다. 실행 방법을 묻기 전에 왜 이 일을 하는지, 고객이 실제로 무엇을 불편해하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때로는 회의 진행을 더디게 만드는 질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자기 분야 바깥의 자료를 읽습니다. 마케터가 물류 리포트를 보고 있거나, 개발자가 고객 인터뷰 녹취를 읽고 있다면 눈여겨볼 만합니다.
뽑는 것보다 키우는 편이 현실적인 이유
경계인을 외부에서 채용하려는 시도는 자주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역량은 특정 회사의 맥락과 결합될 때 발휘되는 부분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회사의 제품, 고객, 내부 정치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경계를 넘나들 대상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회사 안에 있는 사람 중 위와 같은 신호를 보이는 구성원에게 경계를 넘어 볼 기회를 주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다른 부서 사람들과 한 팀으로 실제 문제를 풀게 하고, 자기 전문 영역 바깥의 데이터를 다루게 하는 경험이 그 기회입니다.
이 과정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몇 번의 교육으로 만들어지기는 어렵고, 여러 달에 걸쳐 판단을 반복해 볼 자리가 필요합니다. 육성 프로그램을 어떻게 설계해야 남는지는 핵심인재 육성에 관한 글에서 따로 정리했습니다.
경계인이 자랄 수 없는 환경도 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경계인 기질이 있는 사람을 뽑거나 발굴해도, 조직이 그 사람이 움직일 자리를 주지 않으면 역량은 발휘되지 않습니다. 부서 경계를 넘는 시도가 월권으로 읽히는 문화에서는 이런 사람이 가장 먼저 지칩니다.
사람과 환경 중 하나만 갖추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여러 사례에서 반복해서 확인됩니다. 씩데이터 IX 워룸이 인재 육성과 사일로 해체를 같은 프로그램 안에서 함께 다루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경계인이 실제로 하는 다섯 가지 일
개념만으로는 채용이나 배치에 쓰기 어렵습니다. 조직에서 이 역할을 맡은 사람이 실제로 수행하는 일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고객이 말하지 않는 욕구를 읽어냅니다. 설문 응답이나 클레임에 적힌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뒤에 있는 상황을 추론합니다. 이 작업에는 데이터를 보는 눈과 사람을 관찰하는 눈이 함께 필요합니다.
둘째, 서로 다른 분야의 시각을 붙여 새로운 설명을 만듭니다. 공학적 해법과 인문학적 해석을 한 문장 안에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내부 데이터와 외부 데이터를 가로질러 의미 있는 신호를 찾습니다. 사내 지표만 보면 시장의 변화가 보이지 않고, 외부 리포트만 보면 우리 회사의 제약이 빠집니다.
넷째, 다른 부서와 산업의 맥락을 종합해 판단합니다. 자기 부서 기준으로 최선인 선택이 회사 전체로는 손해가 되는 경우를 알아채는 능력입니다.
다섯째, 부서 간 이견을 결정으로 만들어 냅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이 없을 때, 무엇을 포기할지 합의를 이끌어 내는 역할입니다.
이 역량이 붙는 방식
다섯 가지 모두 강의로 전달하기 어려운 성격입니다. 개념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판단을 내려 보고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 없이는 몸에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성의 형태가 중요해집니다. 실제 문제, 다른 부서 사람들, 여러 달의 반복, 그리고 결정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갖춰진 환경에서 이 역량이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씩데이터와 빅데이터를 함께 다루는 방식은 씩데이터란 무엇인가에서 더 자세히 정리했습니다.
인재상을 바꾸면 제도도 함께 바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점이 있습니다. 인재상만 새로 정의하고 평가와 보상 제도를 그대로 두면, 조직은 기존 기준대로 움직입니다.
부서 경계를 넘어 기여한 일이 어느 부서의 성과로도 잡히지 않는 구조라면, 그런 행동은 자연히 줄어듭니다. 협업 기여를 평가에 반영할 방법, 다른 부서 과제에 시간을 쓴 것을 인정하는 방식까지 함께 손봐야 새 인재상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이 부분은 제도 설계의 영역이라 프로그램 하나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프로그램을 통해 성공 사례가 하나 만들어지면, 제도를 바꾸자는 논의를 시작할 근거가 생깁니다.
참고: Robert E. Park, "Human Migration and the Marginal Man"(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1928) · 백영재, 《경계인: AI 시대, 새로운 인재의 조건》